강화역사서포터즈 "북일곶돈대" 강화역사서포터즈

강화역사서포터즈 답사 마지막 코스 "북일곶돈대"

이날 첫 답사지인 장곶돈대의 포스팅에서의 불안한 마음은 북일곶돈대에서 확인되었다.
사륜구동 자동차를 타고가야 할 듯한 난이도 최상급의 산길을 따라 가보니 해변가가 나왔고, 길이 막혀 있었다. 당황스러운 상황.
서둘러 정보를 검색해보았고, 인근에 강화갯벌센터라는 시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ㅠㅠ 자동차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유적지라고 알려주는 센터의 관계자는 휠체어에 앉아 계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여기부터 4~50분을 걸으셔야 되는데, 휠체어가 갈만한 길이 아닙니다."라고 안타까워하셨다.  

알고보니 북일곶돈대는 강화나들길에 포함된 유적지였다.
목적지가 코앞에 있었지만, 연로하신 아버지 어머니 두분과 함께 북일곶돈대를 답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더운 날씨에 아버지께서는 고통을 호소하셔서, 북일곶돈대 답사는 강화갯벌센터 방문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우리가족의 강화역사탐방은 이렇게 아쉽게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3국의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던 현장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작은 소회를 가족과 함께 나눌수 있어서 더할나위없이 소중한 시간이었고 앞으로 변치않을 추억의 순간있었다고 여긴다.

더구나 건강이 허락치 않는 아버지께서 이번 답사를 무사히 함께 하셔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요 아버지. 

강화역사서포터즈 점심식사 "반선" 강화역사서포터즈

아침일찍부터 서둘러 나선 강화역사서포터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경구는 너무나 낡은 레토릭이지만 배가 든든해야 답사도 할 수 있지요^^

아내가 찾아낸 식당은 "반선" 인천 옹진군 영흥면에서 태어나신 아버지, 인천 남구 학익동에서 태어나신 어머니, 그리고 인천에서 태어나 초중고대학을 나온 나, 또 인천에서 태어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열심히 키우고 있는 아내는 모두모두 해산물에 없이 식사를 하기 힘들어하는 original 인천짠물이다. 더구나 그런 조부모,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아드님 역시 아침식사시간부터 회를 즐길 줄 아는 미감 충만한 어린이이다.

반선에서 제공하는 간장게장은 짜지않되 깊은 감칠 맛을 입안에 가득 안겨주어 공기밥 한공기, 그야말로 게눈 감추었다.

아아 그리고 꽃게탕. 무슨 말이 필요한가. 일단 와서 맛보시라.

그리고 강화 특산 인삼막걸리. 쌉쌀한 그맛이 아주 청량하다. 좋다. 다음 갈길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가족들이 없었다면 주저 앉아 밤새 마시고 싶은 맛이었다.  
 
강화도에 가시면 반선을 찾아가보시라 

강화역사서포터즈 "분오리돈대" 답사 강화역사서포터즈

이쯤에서 돈대에 대해 알아보자.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 조선시대 군사시설을 말한다고 한다. 고려시대 최무선을 통해 화약과 대포를 개발하였고, 잘 알다시피 임진왜란 때 여러 해전에서 일본의 해군을 괴멸시킨 결정적 무기가 바로 대포였으니, 조선의 조정에서 군사적 주요 거점에 돈대를 설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천시내에 위치한 월미도에도 돈대가 서해를 향해 설치되어 있어서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필자는 월미도에서 해군방위병으로 근무했었고, 따라서 월미도의 돈대와 강화도의 돈대들은 그리 낯선 시설이 아니었다. 

우리가족들의 다음 답사지는 "분오리 돈대"
분오리 돈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 분오리 돈은 부천(富川)과 초지(草芝)의 외곽포대로서 망월돈(望月墩)·계룡돈 (鷄龍墩)·굴암돈(堀岩墩)·송강돈(松剛墩)·송곶돈(松串墩)과 함께 영문(營門)에 소속되었던 돈대이다. 따라서 영문에서 돈장(墩將)을 따로 두어 수직하게 하였다. 
조선 현종때 유수 서필원이 정비하였고 포자 4문과 치첩이 37개소이며 부천과 초지의 외곽포대이다. 분오리 돈은 부천(富川)과 초지(草芝)의 외곽포대로서 망월돈(望月墩)·계룡돈 (鷄龍墩)·굴암돈(堀岩墩)·송강돈(松剛墩)·송곶돈(松串墩)과 함께 영문(營門)에 소속되었던 돈대이다. 따라서 영문에서 돈장(墩將)을 따로 두어 수직하게 하였다. 뒷산에서 해안으로 돌출되어 나온 산 능선의 끝부분에 위치하였는데, 좌우로 깊게 만곡(彎曲)된 갯벌을 이룬 포구를 끼고 있어 가시 범위가 매우 넓다. 동쪽으로는 자연암반을 그대로 활용하여 석축함으로써 절벽을 이루고, 지형에 맞추어 석벽을 쌓아 전체적으로 반월형을 하게 되었다. 포좌는 4문이고 치첩(雉堞)이 37개소이다. 기록에 의하면 방형(方形)으로 둘레 84보라 하였는데, 현재 문루 안 포대둘레는 약 70m이다. 홍예문을 이룬 출입구는 북쪽 반월형의 호와 선이 맞닿는 부분에 있고, 최고높이는 4m, 폭은 12.8m이며, 돈대의 평균높이는 2.62m이다. 구조는 다른 돈대와 마찬가지로 내외를 석축한 협축의 석벽을 이룬다
.
"


위의 사진들에서 볼 수 있듯이 경치가 무척 좋은 장소에 설치된 돈대이다.
경치가 좋다는 것은 주변의 여러 지형 지물을 조망하기 좋다는 뜻이다. 결국 조망하기 좋은 곳은 군사적으로 요충지일 수 밖에 없다. 강화도는 남북이 "휴전"으로 대치하고 있는 현 한반도 상황에서 서부전선의 가장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재래식 전쟁이 발발할 경우, 수도권에 진입하는 첩경인 곳이라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재래식 전력에서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는 해병대가 김포에 주둔하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역사유적지에 와서 현재의 남북대치 상황을 떠올릴 수 밖에 없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피할수없는 현실이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지 이제 보름여, 새로운 남북 평화관계의 계기를 삼기를 바란다. 

강화도의 옛 돈대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내 아들의 뒷모습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강화역사서포터즈 "장곶돈대" 답사 강화역사서포터즈

지난 3월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강화의 문화유산을 찾고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강화 답사의 기회를"드린다는 인천문화재단의 공고를 읽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고 해서 녀석의 유치원 시절부터, 함께 인천지역의 여러 유적지를 다니며 주말을 보내기도 했고, 그 유적지중에는 당연히 강화도 포함되었었다. 더구나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역사유적 탐방프로그램을 통해 강화도를 포함한 수도권 인근 지방의 역사유적을 수차례 답사한 바 있었기에, 강화도에 더 답사할 유적지가 남아 있나 심드렁했었다. 
  
그러나 공고문을 자세히 읽어보니 우리가족이 알지 못한 유적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니, 장곶돈대, 북일곶돈대, 분오리돈대였다. 모집공고에 응모를 했고, 이렇게 참여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지난 토요일 5월 27일 아침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아들, 우리 다섯 식구는 강화도로 향했다. 지난 봄 개통된 제2순환(인천~김포)고속도로를 이용하면 김포/강화까지 여행시간이 대폭 절감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신흥동 본가에서 초지대교까지 30여분만에 주파하였다. 이제야 강화군이 우리 인천시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각설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데로 장곶돈대를 향해 내처 달려갔다.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곳은 왕복 2차로 국도 한가운데... 도로표지판도 없었고, 물어볼 사람들의 자취도 없고 잠시 난감했다. 광성보나 초지진, 덕진진 같이 길가에서 확인하기 쉬울 것이라 여겨 주변에 대한 자세한 조사없이 무조건 길을 나선 탓에 벌어진, 잠깐동안의 혼선이었다.   
여하튼 '돈대'라면 조선시대 군부대니까 길가에는 없을 장소라고 추측을 하고 나무가 우거진 사잇길로 차를 이끌었고 구불구불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가서 다행히 장곶돈대를 발견했다. 추후 강화군에서 길가에 표지판을 마련하여 설치해주면 역사유적지로서의 가치가 조금은 살아날 것 같았다. 그리고 표지판에 새겨진 글귀들이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안타까웠다. 작고 허름한 유적지이지만 좀더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장곶돈대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돈대이다.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었다. 미곶돈대(彌串墩臺)·북일곶돈·검암돈과 함께 장곶보(長串堡)에 속한다. 해안방위를 위해 효종∼영조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돈대가 축조되었는데 대부분이 1679년(숙종 5)에 지어졌다. 숙종은 함경·황해·강원 3도에서 8,000명의 승군과 어영군 4,300명을 동원하여 40일만에 49개의 돈대를 축조하였다. 그때 지어진 돈대로, 북일곶돈(北一串墩) 서쪽 1,500m, 검암돈(黔巖墩) 동쪽 1,500m에 있으며 40∼120㎝의 돌을 둥글게 쌓고 4개의 포좌(砲座)를 설치하였다. 위에는 벽돌로 된 여장(女薔)이 90㎝ 간격으로 돌려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숙종연간에 완공된 돈대라 한다. 강화도의 여러 유적지는 고려시대 원나라의 침략과 조선시대 청나라의 침략과 큰 관련이 있다.
남한산성과 강화도를 돌아볼 때마다, 당시 우리들의 선조들이 받았을 고초, 특히 삼배구고두라는 치욕적인 굴복을 당한 인조의 입장이 떠올라 기분이 좋지는 않다.

누대에 걸쳐 우리들이 겪어온 지정학적 난점을 지혜롭게 이겨낼 역량을 키우지 못한 귀결점이란 점에서 삼배구고두의 치욕은 어쩌면 우리 민초들의 불만을 청나라가 대신해준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리저리 포좌에 들어가 대포가 들어가 있었을 자리에서 사진을 찍으며 감상하고 있는데, 아들놈이 주민으로 보이는 분에게 예쁜 리본을 얻어서 달려왔다. 그분이 아들에게 하는 말씀....  "제주도에는 둘레길, 강화도에는 나들길이란다..."
그렇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이번 답사를 왔기 때문에 천천히 걸으며 강화도 이곳저곳을 다녀볼 생각을 못했다.

강화나들길.... 저 리본이 이날 남은 강화답사에 대해 무엇인가를 예고해준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점심을 먹고나서였다... 

<철학고전강의> 2회차독서 마지막 시간 철학고전강의

<철학고전강의> 2회차독서 마지막 시간


"...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얻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의 근본문제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철학이 이제는 물음을 제기하는 학문이기를 그치고 확실한 성과를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하면서 철학의 탐구 대상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앞으로도 변화된 상황 속에서 또 다른 문제들에 직면할 것이고, 그럴 때면 다시금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역사를 되짚어보아야 할 것이니, '근본에서 의심하기'라는 철학적 사색 본래의 요구를 포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적극적인 탐구 대상이 모두 다 사라져버릴지라도 철학에게는 바로 이러한'의심'은 남아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사유가 남아 있다는 것이 철학 고전 읽기가 가져다준 소극적인 각성이라면,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하여 무한자와 유한자에 관하여 사유할 있게 것은 적극적인 성취라 하겠습니다. 형이상학은, 간단히 말하면 한정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탐구입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한정된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것을 생각할 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무한한 것을 사유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동시에 육체의 유한성 또는 차안성 등을 생각할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유한성과 무한성의 대비가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인간은 불행한 의식을 가질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초월적인 것에 대한 의식을 갖게되는 순간부터 불행한 의식은 당연하게 생겨나는 것이고 우리는 불행한 의식 속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불행한 의식을 가진 인간은불행한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무한한 것에 이르고 싶어하면서도 그것에 이르지 못함을 한탄하는 존재입니다. 착하게 살고 싶지만 끊임없이 악한 일을 저지르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날마다잘못을 저지르고 날마다 반성하면서 일상을 쌓아올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그러한 반성마저없으면 인간은 악마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반성을 하게 하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 내면에 있는 무한자에대한 갈망에서 생겨날 것입니다. 이러한 갈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 그런사람이 철학함을 실천하는 인간이요, 진정한 교양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마지막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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